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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됐던 ‘교장바위’… ‘문화재지정 가치’ 인정받았지만 명칭의 진실은

기사승인 2022.01.17  11: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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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자료로 입증된 일본인교장바위 vs 지리적 조건, 자연환경 고려 동학과 충분한 인과성

“미래지향적, 교육적 관점에서 보존 발전시켜야”… 태안동학의 상징적 장소로 부각 의견도

   
▲ 사진은 백화산 동학농민혁명군 추모탑과 교장바위.

명칭의 유래를 둘러싸고 지난해 논란이 일었던 백화산 ‘교장바위’. 교장바위를 둘러싸고 그 유래를 두고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일부 향토사학자들간 이견 차이를 보이면서 ‘교장바위’가 태안향토사에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측은 백화산에 우뚝 서 있는 태안동학농민혁명군 추모탑과 연계해 동학농민혁명 당시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목을 졸려 죽임을 당하고 몽둥이로 맞아 죽었고, 무참하게 학살된 통한의 바위로 목을 졸라 죽인다는 ‘교살(絞殺)’과 몽둥이로 때려죽인다는 ‘장살(杖殺)’을 줄여 교장(絞杖)바위라고 이름 지어 현재까지 부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주장은 백화산 추모탑 일원의 동학 성지화를 위한 스토리텔링이라고 부정하면서, 일제강점기 태안보통학교의 교장이었던 나카오 이따로(中尾猪太郞)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바위 한쪽 구석에 그의 이름을 새겼고, 학교장의 교장(校長)바위라고 주장하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들 향토사학자들은 특히 일제강점기의 역사지우기에 앞서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렇게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태안군은 지난해 백제고도문화재단에 의뢰해 ‘태안 백화산 동학농민혁명 전투지 및 교장바위’에 대한 학술용역을 발주했고, 지난해 연말 ‘충남도 문화재 지정조사 보고서’ 형태로 학술용역 결과물이 나왔다.

이 학술용역 보고서와 관련해 태안군 관계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교장바위 일원을 충남도 문화재로 지정해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군 차원에서도 태안읍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교장바위 일원은 경관이 뛰어나며 태안의 근대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바위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중요 유적”이라고 정의 내리면서 “최근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조성되는 등 주변 여건이 변화되었고 유적의 관리 및 보호를 위해서 충남도 문화재 지정을 신청할 예정으로,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서는 학술적인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에 학술용역을 의뢰한 것”이라고 학술용역 추진 배경을 밝혔다.

교장바위, 동학 관련 “충분한 인과성 성립” vs 일본인교장 “인과성 매우 높다”

그렇다면 ‘교장바위’에 대한 학술용역 결과는 어떠했을까.

학술용역을 맡은 백제고도문화재단은 백화산과 교장바위의 문화재 지정가치에 대해 국보인 마애삼존불입상과 태을암, 백화산성, 그리고 태안동학농민군, 일본인교장에 대한 미담까지 언급하며 ▲태안의 역사가 담겨 있는 역사적 장소로서 가치가 높고 ▲천혜의 자연경관과 태안읍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명승지이며 ▲태안의 근대 교육공간으로서 보존 및 활용할 필요가 있다면서 그 가치를 인정했다.

그러면서 재단측은 교장바위에 대해서는 “교장바위 일원은 태안지역의 동학농민군과 관련된 장소이며 태안공립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에 대한 미담이 전해지고 있는 등 태안의 근대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그 역사성이 매우 크다 할 수 있다”며 두가지 설을 모두 언급해 팽팽한 주장이 맞서는 사실상의 논란을 잠재우지 못했다.

다만, ‘교장바위 유래에 대한 문헌자료 및 고증’과 관련한 연구에서는 “현재 교장바위에 대한 두 개의 유래가 전해지고 있는데 태안지역 동학농민군과 관련한 시기는 1894년 전후 기간이며, 태안공립보통학교 일본인 교장과 관련한 시기는 1921~1924년이다”라며 “문헌자료를 검토한 결과 일제강점기 및 해방 전후의 기록에는 ‘교장바위’라고 명시된 자료는 확인할 수 없었으며, 1990년대 후반 이후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인 교장과 관련한 문헌자료는 태안문화총서Ⅱ ‘태안의 지명’(1993), 에세이집인 ‘향사와 전설과’(1999)에서 언급된 일본인 교장과 관련한 미담이며, 특히 일본인 교장에 대해 ‘개벽’ 제46호(1924), 동아일보 기사(1925년 4월 13일)를 통해 재 확인할 수 있으며 교장바위 동쪽 비위에 새긴 비문이 남아 있어 역사적 사실을 확인케 한다”고 문헌에 근거한 유래를 확인했다.

반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문헌기록에 대해서는 “장소적 측면에서 바위와 관련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면서도 “다만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학살장소는 교장바위 인근, 모래기재, 태안여고 인근 개울, 샘골마을, 남문리 냇가, 정주내 등으로 적고 있어 문헌기록, 관련자 증언, 연구결과 등을 종합하면 마을과 인접한 장소에서 동학농민군이 학살되었다는 것은 인과성이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현재로서 확인할 수 있는 근대시기 문헌기록에서는 ‘교장바위’라는 명칭은 찾을 수가 없었으며, 교장바위라 불리워진 시기를 특정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재단측은 교장바위의 장소적 측면에서 “동학과 관련한 사건은 현재까지 조사된 기록에서 교장바위로 특정해서 일어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사건의 장소가 태안읍성 주변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당시의 교장바위 일원의 지리적 조건, 자연환경을 고려할 때 충분한 인과성이 성립된다 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일본인 교장과 관련한 미담은 기록에 있다는 사실과 바위 벽면에 일본인 교장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가 명확히 확인됨에 따라 명칭과 관련한 장소적 유래에 대해 인과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불필요한 논쟁 바람직하지 않아”… 새로운 이름 정하는 방안도

끝으로 재단측은 불필요한 논란보다는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발전시켜야한다는 시사점도 제시했다. 재단은 “불필요한 논란은 태안의 근대역사를 이해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고, 특히 입으로 전해져 온 명칭에 대해 한자표기와 같은 불필요한 논란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다 판단된다”면서 “특정바위가 아니라 장소적 측면에서 교장바위 일원은 일제강점기 시기에 태안의 아픈 역사와 애환이 담겨 있는 장소로서 그 가치가 높아 태안의 근대역사에서 지리적으로 인접한 교장바위 일원에서 일어난 역사적 장소 측면과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보존하고 교육적 관점에서 발전시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안했다.

이같은 조언은 이번 학술용역에서 자문의견을 낸 공주대학교 윤용혁 교수도 의견서에 명시했다.

윤 교수는 “교장바위의 명칭을 둘러싼 논쟁은 현실적으로 객관적 결론을 확정할 수 없는 사안이어서 이에 대한 논쟁을 지속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교장바위의 가치를 부각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사안이므로 대립하는 의견을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대안으로 “교장바위라는 이름은 아주 오랜 이름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백화산 큰바위’ 등 새로운 이름을 정하는 것도 한가지 방안이다”라고 제안했다.

덧붙여 윤 교수는 “태안의 동학역사는 향후 내포지역의 동학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갖는 것이므로 교장바위를 태안동학의 상징적 장소로서 부각하고, 이를 문화재로 지정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김동이 기자 east334@hanmail.net

<저작권자 © 태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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