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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태안과 동학농민혁명

기사승인 2021.03.18  13:5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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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문환 전 태안부군수, 시인

동학농민혁명혁명은 왜 일어났을까? 그 배경과 원인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것이다. 조선왕조 519년 27명의 왕들과 그 왕가 일족 그리고 양반들은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 어깨 위에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사농공상(士農工商) 그리고 천민의 견고한 사회적 계급은 다시 적서(嫡庶), 관노비와 사노비(私奴婢) 등으로 무수히 세분되었다. 백성들에 대한 노역과 징세 착취가 극심한 사회였다. 왕가의 혈통 다음으로 양반 계급은 전체 인구의 6~10% 정도였고 상민과 노비는 70% 내외의 인구 구성이었다. 나머지는 중인이었다.
양반은 노동을 수치로 여겼고, 오로지 노비와 상민 등의 생산 활동과 노역 공여로 사회가 유지되었다. 양반은 군역(軍役)면제는 물론 대부분 면세의 혜택도 누렸다. 세종대왕은 성군이었지만 노비종모법을 만들어 당시 전체 인구의 40%까지로 노비를 늘린 일은 훈민정음 창제와는 매우 상반된 사회정책이었다. 양반들은 사노비의 생사여탈권을 쥐었다.
퇴계 이황 가문의 노비가 350 여 명이나 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조선 후기에서 구한말 왕조의 부패는 44년 동안 한성판윤(서울시장)이 보름마다 바뀌는 매관매직 이었다.  가렴주구는 백골징포 황구첨정 백지징세, 즉 죽은 사람과 어린애는 물론 빈 땅에도 세금을 물렸다.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세 착취였다. 멀쩡한 보(湺) 밑에 착취를 위한 보를 그것도 백성의 노역에 의해 따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5 백여 년 동안 숨 못 쉬는 압제와 비참한 가난으로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 기층민의 반감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하 동학혁명이라 한다)의 원인(遠因)이었고 외세의 침략에 무능했던 조정에 대한 실망이 하나의 근인(近因)이었을 것이다.

그 동학혁명의 북쪽 갈래(北接)의 충청지역 최초 기포지가 원북 방갈리이고 우금치 홍주성 전투 등 치열한 격전 끝에 태안 백화산에서 최종 패퇴한 동학혁명군이었다. 어찌보면 충청지역 동학혁명은 태안에서 북접 최초의 기포로 시작되어 태안에서 소멸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청일전쟁은 이원 앞바다 음포(은포)와 관련이 있다. 대동아전쟁 당시 안흥항 먼 바다에서의 해전은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역사적 과제일 것이다. 만주의 콩깻묵을 싣고 가던 일본 화물선이 포격으로 난파되어 해안에 떠밀린 콩깻묵 포대 속에 시신 조각이 함께 떠밀렸다. 그 콩깻묵 포대를 민물에 씻어 해안가 주민들이 나눠 먹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태안은 근현대사 주요 관련 지역의 한 곳으로 보여진다. 특히 태안의 동학혁명은 1894년 10월1일 기포에서 동학혁명이 끝날 때까지의 전투 진행 과정 그리고 패배에 이르는 모든 기록이 고스란히 보관되어있다.
전국 동학혁명의 핵심 참여자 3,644명 중에서 충남지역 참여자는 816명(22.4%)이다. 이 중에서 태안 출신은 홍주(127명) 공주(112) 천안(91) 서산. 해미(108)보다 제일 많은 129 명으로 충남지역 참여자 중 15.8%에 달한다. 두 차례에 걸쳐 가장 치열했으며 또한 분수령이 되었고 동학혁명군의 남 북접이 만난 우금치 전투지역인 공주보다 핵심 참여자가 많았던 것은 태안지역의 동학혁명 열기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이다.
필자는 중고교 학창시절 동학혁명을 동학란으로 배웠다. 동학혁명은 고려조 최대의 저항운동인 망이 망소이(亡所伊 ) 난(1177년) 조선조 홍경래의 난(1811) 등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다. 이들은 최하층민 이거나 지역 차별에 대한 불만이 큰 원인이었다. 그러나 동학혁명은 사람이 하늘이다. 사람을 하늘처럼 섬겨라. 이와 같은 종지(宗旨)나 보국안민 제폭구민 광제창생 척 양 왜의 4대 강령이 지닌 사상과 이념은 모든 백성을 염두에 둔 보편타당한 사상으로 세계의 유수한 혁명정신이나 사상에 견주어 봐도 손색이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영국의 명예혁명(1688)이나 프랑스 대혁(1789)을 능가하는 사상과 강인한 투쟁력을 보여준 혁명이라는 점이 최근 학자들에 의해 논의되고 있다. 전자의 혁명들이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조세저항이나 권리 확충이었던 점에 비해 동학혁명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주권재민 사상에비해서도 조금의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동학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말과, 동학을 세계에
널리 알리자는 동학의 세계화가 언급되고 이 또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태안지역의 동학혁명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고 어느 만큼 오늘날에 계승되고 있을까? 태안의 동학혁명사는 1. 경주로부터 직간접으로 유입된 동학의 포교와 2. 기포를전 후한 관아의 습격 성공 3. 잔혹한 동학군 토벌 작전에 의한 희생으로 구분될 수 있겠다.
태안의 동학은 태안 읍내 장현리 최형순(崔亨淳)이 경주로 시제를 지내러 다니면서 최시형으로부터 동학을 배워 전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태안지역에 동학운동이 활발했던 배경에는 비옥한 농경지와 풍부한 어장, 가끔씩 중국의 난파선이 교류 역할을 하고, 국내·외 장사꾼들의 빈번한 출입에 의한 인적 왕래가 잦았던 것을 그 배경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이에 따른 수탈 또한 극심했다고 한다. 태안의 동학혁명은 조석헌 문장준의 “북접일기”에 소상히 기록되어있다. 이 “북접일기”는 전국의 동학운동 기록 중에서도 매우 귀중한 사료의 하나로 일찍이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기록 등에 의하면 1894년 9월 그믐날 아산 포구를 떠난 동학 혁명군 선단이 원북 방갈리 학암포에 닻을 내리고 이를 기다리던 태안 동학도들이 밤새 소리없이 걸어서 백화산에 숨어들었다. 이튿날 10월 초하루, 장터에 모여든 성난 동학도들이 옥에 갇힌 30여명의 동학도들을 구출하고 군수 신백희와 순무사 김경제를 비롯, 아속들의 목을 내리쳤다. 태안 관아가 함락되던 날 이웃 서산에서도 군수 박정기, 아전들이 참수되었다. 10월 22일 태안 동학군은 서산을 경유, 해미 귀밀리에 진을 치면서 동학 봉기 가담자가 급격히 불어나자 사기가 충천 되었다. 해미 승전곡 전투 신례원 관작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은 홍주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 유회군(儒會軍)에게 죽창과 쇠스랑 등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크게 타격을 입고 패하여 이때부터 쫓기기 시작했다.

쫓기는 동학 혁명군은 해미 구성산과 지성 그리고 서산 매현에서 연달아 패하고 끝내는 태안 백화산에 숨어들었다. 관. 일. 유회군의 습격을 받은 동학군은 교장(絞杖)바위에서 무참히 교수형 총살형 타살형으로 바위를 피로 물들이고 골짜기는 시신혈천이 되었다. 근흥 수룡리 토성산에 숨은 일부 동학군은 소 여물을 써는 작두 참수에 희생되었다. 일제(日帝) 만주 관동군의 만행과 똑같은 짖 이다.  그 참혹한 역사적 증거물인 작두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되고 있으나 태안동학농민기념관이 개관되면 반환 운동을 벌여야 옳을 것이다. 태안 읍내 장작리 윤씨 부인이 읍내 개구랑목에서 총살당한 남편의 시신을 머리에 이어 운구하여 거두어 하관하고 나서, 순식간에 무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이는 “동학군의 아내”라는 실화소설로 쓰여졌다. 그 후 110 여 년의 세월이 말없이 흐르는 동안 한때 동학혁명은 반란으로 평가 절하되고, 반란군의 후손으로 살아온 유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선대의 한을 가슴에 묻고 숨죽여 살아온 후손들은 결국 2004 년 동학혁명 참가자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그 응어리가 마침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그것이 시작이었을 뿐, 동학혁명에 대한 연구와 평가 그리고 그 계승과 선양에 관해서는 현재와 미래 세대의 과제라고 보여진다. 태안 동학농민혁명의 기포와 그 이후 동학혁명 그리고 그 정신의 계승과 선양사업에는 문장준 문장로, 독립운동가 문병석, 문구석 원암 문원덕은 물론 그 자식 세대가 중심이 되어왔다. 남평문씨 일가 4대 127년에 걸친 헌신에 의해 태안지역 동학 혁명정신의 선양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원암 선생은 겉보리 등 곡식을 찬조받아 전국에서 처음으로 민간 모금에 의한 동학혁명추모탑을 백화산 산록에 세우기도 했다.

 문씨 일가 후손 중에는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3백 여점의 기록물. 유물의 보존과 발굴은 물론 3백 명에 가까운 순도 순국자 발굴, 또한 4백 여 명의 유가족을 등록시킨 사람이 있다.
그의 힘이 주동이 되어 동학혁명 기포비 유적. 공적비 등을 5개소에 세우기도 했다. 앞으로 유적지에 추모비 등을 세우는 일과 함께 유적지 정비사업은 행정기관에 의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의 어릴적 부친 심부름까지 감안 한다면 그는 평생을 동학혁명 정신 선양에 몸 바쳤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의 노력은 마침내 백화산이 충청남도 역사유적지로 지정되는 사실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이미 그 지정 용역비까지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내포 지역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결전지 백화산 기슭에 아담한 태안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드디어 개관을 앞두고 있다. 이는  전국에서 세 번째이고 전라권을 벗어나서는 태안이 최초이다.
태안의 큰 경사이고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동학혁명이 활발했던 충청지역의 홍성 예산 아산  천안, 멀리 강원도 홍천 등에서도 이를 무척 부러워하고 있다. 더욱이 필자가 2003년 추모제를 주관했던 우금치 전적지가 있는 공주에서는 태안에 자극을 받아  350 여억 원을 투자하는 년차 사업으로 규모가 매우 큰 동학혁명 전적지 조성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제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개관을 앞두고 누가 태안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초대 관장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도 군민들의 관심이 적지 않다. 태안의 동학혁명정신선양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는 그 선임이 폭넓고 깊이 있게 고려될 것으로 믿어진다. 독립기념관장 이나 전국의 사적지 등 관리소장 그리고 광복회장을 맡아온 지도자들의 사례가 참고 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우리 태안군민의 여망도 감안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태안신문사 taea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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