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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 출신 채광석 민족시인, '국립5.18민주 묘지'에 잠들다

기사승인 2020.08.26  16:4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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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주기 맞아 지난 6일 국립5·18묘지 2묘원에서 천장식 열려

국가보훈처에 의해 6월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선정돼 이장

   
▲ 지난 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민족시인 채광석 시인의 안장식이 유족과 문인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안면도 출신 채광석 민족시인((한국 작가회의 명예 사무총장) 지난 6일 오후 광주광역시 국립5·18민주묘지 2묘원으로 이장되어 영결식 열렸다. 국가보훈처에 의해 올 6월 민주유공자로 결정된 것을 계기로 33주기에 즈음하여 경기도 양평 자하연 팔당 묘원에 영면되어 있던 고인의 유해가 5.18 민주묘지로 옮겨온 것이다.

이날 국립5·18민주묘지 2묘원에는 미망인인 강정숙 여사와 외아들 수왕씨 및 채 시인의 아우 희석씨, 광주의 원로 소설가 이명한씨, 김완 시인(광주전남작가회의 회장), 전북의 김용택 시인, 서울의 홍일선 시인(한국작가회의 자문위원)·김학민씨(민중문화운동연합 창립 동기·경기문화재단 이사장)·유영표 서울대 5·22사건 동지(김상진 열사 장례식사건), 장영달씨(민청학련계승기념사업회 공동대표), 이은봉 시인(대전문학관장) 등 50여명의 채 시인의 족적이 작지 않기에 그를 기억하는 문단과 민주화 운동을 함께한 사람들이 모여 그를 추도하는 자리였다.

   
▲ 지난 2000년 7월 12일 안면도 자연휴양림에 마련된 고 채광석 시인 추모시비.

채 시인은 1970년대와 1980년대 군부독재권력에 맞서 싸우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 한국문단에 큰 충격을 안겼었다. 더욱이 그가 군사독재 정권 아래 ‘호헌반대 1백만인 서명’과 ‘문학인 193인 개헌촉구 성명’ 운동 등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전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를 재 창립하는데 온힘을 쏟았다는 것은 물론이고 ‘노동시인’인 박노해 시인도 그의 손을 거쳐 발굴됐다고 한다.

이날 행사에는 유독 눈에 띄는 펼침막이 걸려있었다. 싸움을 감독하고 사기를 북돋워준다는 사전적 풀이인 독전(督戰)의 의미가 담아 ‘민족문학의 독전관(督戰官) 고 채광석 안장식’이라는 펼침막에서 보듯이 채 시인은 1980년대 민족문학을 말할 때 그 첫 페이지에 이름이 새겨질 정도로 한국 민족문학의 맥통을 계승했고, 그 재창조 작업에 헌신한 민족민중운동권의 대표적인 활동가이자 민주투사이다.

안장식에서 추모시를 바친 이승철 시인은 "그의 문단활동은 5년 남짓에 불과했지만, 채광석은 ‘운동으로서의 문학’에 적극 매진하면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민중문학’ 혹은 ‘민중적 민족문학’을 1980년대 문학의 주류로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밝혔다.

채 시인의 아내 강정숙씨는 추모객들을 위한 답사에서 "몇 년만이라도 더 살았으면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을텐데…하는 생각이 늘 사무쳤을 정도로 너무 짧은 삶을 살다 갔다. 세월이 가면 잊혀지리니 했지만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돌아가신지 33년이 됐지만 이렇게 많은 분들이 안장식에 참여해주신 것을 보면서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이날 안장식에 참여한 박관서 시인은 페이스북을 통해 “그의 시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부끄럽고 참람한 심정으로 읽고 왔다. 이를 다시 반성하는 졸시 한편으로 마음 한켠에 꺼지지 않는 혼불로 모시기로 한다.”며 <채광석>이라는 시를 올려놓았다.

<채광석>   -박관서-

당신이 가고 나서 비루해졌다

민중문학에서 민중이 슬슬 지워졌고
노동문학을 하던 이들이 교수가 되거나

평론가가 되어 노동문학을 더 지독하게
눈을 깔고 내려 보다가 밀쳐 두었다

사라진 건 없는 데 사라진 민족문학은
한국문학이 되었다 이미 말로 일국을 이룬

통일문학이야 진즉에 사라져
세계문학이 되었다 국경 없는 욕망이 되어

일년이면 이천여명이 죽어나가는
노동의 검은 눈빛 위에 오방색 감탕

신선로가 되었다 뜨겁지 않게 뜨거운
문학의 언어를 말아 삼키다가 간신히

당신을 보았다 새파란 불꽃이었다

 

<39세의 짧은 삶을 살다간 민족시인 채광석>

   
▲ 고 채광석 시인

채광석 시인(사진)은 1948년 7월 11일 안면읍 창기리에서 18대·20대 안면면장을 지낸 고 채규송 면장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해 창기초, 안면중을 거쳐 대전고, 서울대 사범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다.

1975년 서울 농대생 김상진 열사의 추모 시위 관련해 구속 수감되는 옥고와 1980년 5월 다시 구속되어 모진 고문을 이게 내고 1983년 문학평론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 시 〈빈대가 전한 기쁜 소식〉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민중적 민족문학론을 제기하면서 백낙청, 김사인 등과 더불어 1980년대 문학논쟁에 참가했다. 창작 주체의 계급론적 차별성 문제, 수기의 문학 장르 가능성의 문제, 집단 창작의 문제, 문학 조직의 문제 등을 문단에 던지는 등 1970년대에서 1980년대 문단 평론계의 한 맥을 형성했다. 1974년 오둘둘 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복역,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40여일간 모진 고문을 당했고〈애국가〉, 〈검은 장갑〉 등의 시를 쓰기도 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1987년 7월 12일 교통사고로 향년 39세의 꽃다운 나이에 사망하였으며, 장례는 민통련이 주관으로 민주문화인장으로 거행되었다.

저서에 평론집 《민족문학의 흐름》, 시집 《밧줄을 타며》, 서간집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사회문화론집 《물길처럼 불길처럼》 등이 있다. 유고집으로 《민족문학의 흐름》이 있다.

지난 2000년 7월 12일 안면도 휴양림에는 문학계와 지역인사들이 공동으로 채광석 시인의 흉상과 ‘기다림’의 추모 시비가 건립되었다. 이후 이곳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이  채광석 문학 축전과 태안반도 안면청년회가 주관하는 ‘채광석 백일장’ 이 열렸으나 그나마 지금은 그 맥이 끊긴 상태이다.

신문웅 기자 shin0635@hanmail.net

<저작권자 © 태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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